히가시노 게이고 - 『백야행』
드디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백야행』을 완독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는 1999년에, 한국에서는 2000년(태동출판사, 정태원 번역)과 2016(재인, 김난주 번역)에 출판되었습니다. 소설 분량이 꽤 있어서 3권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그 특이하고 묘한 스토리에 빠져들어 생각보다 금방 다 읽어버렸네요.
제가 읽어보았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 스토리 면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추리 소설’이 아닌, 깊은 ‘문학 작품’으로서 여겨졌다고나 할까요. 작품에서 풍기는 무게감과 분위기가 기존의 작품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백은의 잭』, 『위험한 비너스』 등의 가벼운 킬링타임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음울한 분위기 때문에 주요 인물 몇명의 행적 및 그 동기를 계속 생각하며 읽게 해주었거든요.
『백야행』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과 그것을 품는, 그것을 품게 한, 그리고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살인 사건. 그 사건의 피해자, 원인 제공자,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은 여럿 사람들이 19년의 세월 동안 끊임 없이 이 사건을 품고 살아가는 내용이죠.
이 책 또한,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초반에는 매 챕터마다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들이 계속 나와서, 그 관계들을 기억하느라 상당히 애먹었습니다. 다른 소설들은 초반부터 대충 누가 주인공인지 파악이 되어 그 사람 위주로 관계를 정리했었는데, 이 책은 원채 많이 등장하다보니 그게 좀 어려웠습니다. 2권 중간쯤 가서야 서서히 연결고리가 보이더니, 하나씩 그 그림들이 이어지며 전율이 이는 결말로 막을 내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의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르바이트 채용은 점장이 알아서 하니까.”는 읽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소름이 묻어나오는 문장이죠.
읽는 내내 의아해했던 건, 게이고의 작품 치고 유난히 성적인 장면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더 놀라웠던 건 그 안에서 대부분의 사랑이 비뚤어져 있으며, 심지어 그 중 몇 가지는 작가가 일부러 그 흔적을 안개처럼 흐리게 표현했다는 점이죠. 책을 다 읽고 난 후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면서 결말과 결부 지어 이해해보려다, 작가가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을 절제했는지에 대해 상당히 놀랐습니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보다, 독자가 추상적으로 눈치채게끔 하여 감정을 배가하려는 의도였겠죠.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오사카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종종 오사카가 작중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이 작품 또한 1973년 오사카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등장시킵니다. 1973년부터 1992년까지 약 19년 동안 서서히 시간 이동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과정에서 드러난 시대적 배경 묘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기공학과 출신 답게 그 시대에 등장한 퍼스널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게임 개발과 해적판 라이선스 분쟁, 전화기 도청, 현금카드 불법 복제, 해킹 등에 대한 설명이 꽤나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술 발전 뿐 아니라 일본의 경제 및 사회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불안에 따른 생필품 사재기, 경제 버블 속 호재와 악재로 인한 사람들의 고뇌, 주식의 거래 및 부동산 매매는 스토리를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들을 하죠. 게다가 유키호와 그녀의 직원들로 대표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 - 전통적 수동적 여성상에서 적극적 형태로 변해가는 미세한 사회의 인식 변화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중에는 태양이 뜨는 때와 지는 때가 있어.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지. 물론 실제 태양처럼 정기적으로 일출과 일몰이 찾아오는 건 아냐. 사람에 따라서는 태양이 가득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계속 어두운 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떠 있던 태양이 져버리는 것이야. 자신에게 쏟아지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지.
난 말이지⋯⋯. 태양 아래에서 산 적이 없어.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구글에 검색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백야행』을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도, 유년 시절에 괴물의 심연을 마주했던 누군가가, 더 무서운 괴물이 되어 방황하는 이야기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인 『악의』만큼이나 인간의 어둡고 섬뜩한 내면을 보여주는 작품. 분량은 꽤 있지만 그만큼 몰입도도 있고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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