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 『7년의 밤』
작은아버지가 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의자 한구석에 옹크려 앉아 아저씨의 휴대전화를 열었다. 대기화면에 깔린 사진을 들여다봤다. 안개 낀 별채앞길, 불 켜진 가로등들, 측백나무 책가방을 들었고 사내아이는 남자의 바지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였다. 열흘 전 아침, 아저씨가 찍었을 우리의 뒷모습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접어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은 ‘지난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은 ‘지난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 ‘그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 『7년의 밤』, 8p <프롤로그> 中 -
『종의 기원』, 『28』에 이어, 정유정의 『7년의 밤』을 읽어보았습니다. 역시나 기존 작품들과 비슷하게 강하고 자극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소설 『28』이 동물을 지키는 자와 해치려는 자의 대결구도였다면, 이 책 『7년의 밤』은 가정을 지키려는 자와 훼손하려는 자 간의 대결 구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세령이라는 여자 아이를 매개로 연결된 두 가정의 가장 ‘최현수’와 ‘오영제’가 <세령호>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대결을 벌이는 구도입니다. 한명은 가해자로서, 한명은 피해자로서. 한명은 돈을 움켜쥐고, 다른 한명은 돈에 허덕이며 말이죠. 그동안 접했던 사이코패스 / 복수극의 책 중에서는, 제 마음속에서 상당히 높은 순위를 점하게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알람소리가 현수를 깨웠다. 그는 소스라쳐서 고개를 들었다. 사방을 더듬은 끝에 셔츠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오케스트라연주를 퍼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셔츠주머니 단추가 은행금고만큼이나 암팡지게 채워져 있다는 것도.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머니를 당겨 단추를 뜯어버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알람을 끄자마자 옆자리에 내동댕이 쳤다. (…) 차에서 내려 보니 셔츠가 피투성이였다. 손에도, 팔에도, 바지 허리춤에도 거뭇거뭇한 핏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차의 보닛은 우그러졌고, 앞 차창은 거미줄처럼 금이 갔고, 오른쪽 전조등은 깨진 상태였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물건을 몰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인터체인지를 통과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이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책이 영화화되면 꼭 한번 영화관에서 봐야겠다”였습니다. 작중 묘사나 긴박한 분위기, 후반부의 몽환적인 장면에 압도적인 서스펜스까지. 정말 영화로 만들어지기 좋은 요소들이 마구 들어있었거든요.
여태 읽었던 정유정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산뜻한 향보다 맵고 자극적인 맛의 책이었습니다. 그 주요 원인은 바로 사이코패스의 등장에 있었는데, 『7년의 밤』 역시 이러한 속성의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거침없이 스토리를 휘젓고 다니죠. 그 덕분에 숨막히는 분위기와 압도적인 몰입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대단원이 막을 내리고 결말을 맞이할 때 느꼈던 후련함, 안도감, 그리고 아쉬움이란…
그는 기어를 당기듯, 움켜쥔 목을 끌어당겨 세령을 일으켜 앉혔다. 곧장 ‘교정’을 시작했다. 세령은 제 얼굴로 날아드는 주먹을 멍하니 쳐다봤다. 영제가 주먹을 거둬들였을 때, 세령은 몸이 뒤집힌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흰 이불 위로 붉은 얼룩이 번졌다. 그는 세령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다시 일으켜 앉혔다. 머리채를 틀어 얼굴을 위로 들게 했다. 갸름한 턱선 밑으로 코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에선 신음이 샜다.
오영제는 번호를 누르고 나를 노려봤다. 눈자위가 온통 시커멨다. 총구는 내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헛소리면 곧장 골로 보내주겠다는 듯.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저편으로 가는 신호음만 화재경보 벨처럼 크게 울렸다. 마침내 수화기저편에서 여자목소리가 났다. 뭐라고 하는지는 크게 알아듣지 못했다. 광적인 흥분이 오영제의 얼굴을 덮어버리는 것만 보였다. 그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며 여자를 불렀다. “문하영.”
『채식주의자』도 그렇고 『7년의 밤』도 그렇고 이상하게 요즘 읽는 국문학 소설들은 추상적이고 자극적인 작품 뿐이네요. 조금 다른 방향의 책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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