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해변의 카프카』, 『기사단장 죽이기』
”오시마 상, 내 주위에서 잇따라 여러가지 일이 일어나요. 그 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 두가지를 잘 구별할 수가 없게 됐어요.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내가 그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돼요.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말예요.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어요.” - <해변의 카프카> 中 -
내가 필요로 하면 그녀는 언제든지 거기 있다.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강한 자력이 나를 뒤로 잡아당긴다. 다리가 마치 납을 집어넣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를 지나버리면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나는 멈춰 선다. 나는 시간의 발자취를 놓쳐버린다. 앞서 걸어가는 병사들의 등에 대고 말을 하려고 한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계속 여기에 머무르겠어요, 하고. 그러나 그 말은 소리가 되지 않는다. 말은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다.
나는 그때 공백과 공백 사이에 껴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나는 격심한 모래 바람 가운데 혼자 있다. 내가 뻗은 손끝조차도 안 보인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가 없다. 뼈를 부순 것 같은 흰 모래가 나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사에키 상이 어디에선가 나에게 말을 건다. “그래도 너는 역시 돌아가야만 해” 하고 사에키 상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어. 네가 거기에 있기를 내가 원해.”
주술이 풀린다. 나는 다시금 하나가 된다. 내 몸에 따뜻한 피가 돌아온다. 그것은 내가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피다. 그녀의 마지막 피다. 다음 순간 나는 앞을 향해 병사들의 뒤를 쫓고 있다. 내가 모퉁이를 돌자 산속의 작은 세계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것은 꿈과 꿈의 틈새로 빨려들어간다. - <해변의 카프카> 中 -
몇년 전부터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 되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이 작가가 알고 싶어져서 『해변의 카프카』와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하루키의 문학성이 잘 담긴 걸작이라는 평을 많이 들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들이 꽤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좀 적어볼까 합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몽환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심리 묘사는 머릿 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면에서 상당히 구체적이며, 동시에 독자 개개인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메타포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추상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묘사와 그 특유의 스토리 덕분인지, 하나의 긴 꿈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단원이 막을 내리고 마지막 책장을 넘겨 꿈에서 깨어날 때,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래 남아 마음을 적셨습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15살의 소년이,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중년의 남성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책 속에 갇힌 주인공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접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대리인이기도 합니다. 그 나이 때에 고민할 법한 것들을 위주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장면들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본인과 동일시하게 만들며, 공감하고 몰입하고 희열을 느끼게 해줍니다. (심지어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1인칭 주인공의 ‘나’ 대신 ‘너’를 사용한 문장도 있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자층이 꽤 두터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년의 남성이 주인공인 『기사단장 죽이기』의 상황들은 제 입장에선 크게 공감이 되진 않았지만, 언젠가 제가 나이를 먹어 30대가 되어 다시 읽어본다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다만, 매 챕터마다 야한 장면이 꼬박꼬박 등장하는 것은 제가 느꼈던 거의 유일한 반감 요소였습니다. 사실 과거에 동일 작가의 『색채가 없는 다카기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 야한 장면 또한 작가 특유의 묘사와 결합하여 상당히 자세하고 은밀하며 외설적으로 표현되는데,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서 읽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게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작가의 방향도 이해할 순 있으나, 저에게 있어서는 작품의 몰입을 해칠만큼 거북하게 다가왔습니다.
야한 장면이 덜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어쨌든 두 권 모두 상당히 감명 깊게 읽고 긴 여운을 남긴 책이었으며 적극적으로 읽어보기를 추천드립니다. 저는 나중에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난 후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며 이 작가를 더 탐구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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