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젊은 베르터의 고통』
다른 책들에 비해 읽기 까다로운 소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책의 절반 이상이 베르터 본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글이었고, 미사여구와 비유가 너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이 책의 묘미이며, 베르터의 내적 고뇌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도 잘 알려져있는 이 책은, 베르터라는 남성이 샤를로테(또는 로테)라는 여성을 짝사랑하면서, 파멸을 향한 심적 고뇌를 겪는 스토리를 품고 있습니다. 베르터는 우연히 만난 샤를로테와 교제하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미 그녀는 알베르트라는 남자와 약혼한 사이였죠. 그는 알베르트를 질투하며 희비가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작가 괴테는 본인, 그리고 지인의 직 · 간접적인 경험담을 모티브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작중 인물들의 행보는 그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을 운운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모습이나 베르터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 방식, 혹은 그가 표출한 가식적 계급 사회에 대한 역겨움 등은 이 책이 출판된 1770년대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보편적 관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이 책은 독자를 상정하고 쓴 베르터의 편지만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한 개인의 시점만으로 쓰인 짤막한 글들만으로, 여러 개성의 등장인물들이 뒤섞인 거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낸 괴테의 천재성에 감탄했습니다. 이하의 토막글은 제가 책을 읽으면서 기록해두고 싶었던 글 조각들입니다.
5월 22일
인간의 삶이 한갓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야. 그런데 이러한 감정이 나에게까지도 항상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어. 활동하고 탐구하는 인간의 힘이 갇혀 있는 한계를 볼 때나, 우리의 비참한 현존을 연장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목적도 갖지 못하는 온갖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모든 힘이 집중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탐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모든 만족이 단지 꿈꾸는 듯한 체념에 불과하다는 것. 이때 사람들이 자신들이 갇혀 있는 사면의 벽을 화려한 형상과 밝은 전망으로 색칠하는 것을 볼 때마다, 빌헬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어. 나는 나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아 거기서 또다시 예감과 막연한 욕망 속에서 말이야. 그러면 내 감각 앞에서 모든 것이 부유하듯 떠도는데, 그럴 때면 나는 꿈꾸듯 그 세계를 향해 계속해서 미소를 던져.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식이 풍부한 학교 교사나 가정 교사들이 한결같이 동의해. 하지만 어른들도 어린아이들과 마찬기지로 이 지상을 헤매고 다니면서도 자신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 참된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아이들처럼 비스킷이나 케이크, 자작나무 회초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내게는 손에 잡힐 듯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는데도 말이지.
네가 이 점에 대해 내게 뭐라고 할지 잘 알고 있으니 기꺼이 고백하지. 어린아이들처럼 하루하루에 몰두하며, 인형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고, 엄마가 설탕 입힌 빵을 넣고 잠가 둔 서랍 주위를 심각하게 서성거리다가, 원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으면 볼이 터질 듯 우겨 넣고는 “더 줘!”라고 소리치는 이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겠지. 그들이야말로 행복한 피조물일 거야. 자신들의 하찮은 관심사나 열정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면서, 인류의 구원과 복지를 위한 대규모 사업이라고 간판을 거는 자들 역시 행복하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 하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나, 행복한 모든 시민이 자신의 작은 정원을 얼마나 예쁘게 낙원으로 꾸밀 줄 알며, 또 불행한 사람도 무거운 짐을 진 채 자신의 길을 힘겹지만 쉬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 햇빛을 1분이라도 더 보는 것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 바로 그런 사람은 입을 다물고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지.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이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 비록 그는 제약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마음속에 언제나 자유라는 달콤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 그것도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이 감옥 같은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야.
3월 15일
나를 이곳에서 떠나게 만들고야 말 불쾌한 일을 당했어. 나는 지금 이를 갈고 있어! 제기랄! 이 불쾌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제거되지 않아. 그리고 그 책임은 바로 너희에게 있어. 나를 자극하고 몰아대고 괴롭혀서 마음에도 없던 자리에 가 앉도록 한 너희 말이야. 이제야 난 그걸 깨달았어! 너희도 알게 되었겠지! 그리고 내 지나친 이상이 모든 걸 망쳤노라고 네가 두 번 다시 말하지 못하도록 한 가지 얘기를 해 주지, 친구. 마치 연대기 저자가 기술하는 것처럼 명료하고도 솔직하게 말이야.
C 백작이 나를 좋아하고 각별히 생각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그 점에 대해선 너에게 이미 백번도 넘게 얘기했을 거야. 어제 나는 백작 집의 만찬에 갔는데, 이날 저녁이 마침 상류 계급의 고상한 남녀들이 모이는 날이었어. 난 그런 모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 보지도 않았고, 우리 같은 하위직들이 그 자리에 낄 수 없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어. 하여간, 전말은 이래. 나는 백작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커다란 홀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백작이나 그곳에 온 B 대령과 얘기를 나누는 거야. 그러다가 파티 시간이 다가오는 거지. 그런데 맹세코 난 그 점에 대해 아무 생각도 못하는 거야. 그때 지나치게 고상을 떠는 S 부인이 남편과 함께, 납작한 가슴에다 말끔한 코르셋을 두른 잘 부화된 거위 새끼 같은 딸을 데리고 등장하는 거지. 이들은 지나가면서 대대로 물려받은 고위 귀족다운 눈과 콧구멍의 자세를 보이는 거야. 내게 이런 족속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일기 때문에 당장 자리를 뜨려 했어. 다만 백작이 구역질 나는 수다에서 풀려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이때 내가 아는 B 양이 들어왔어. 그녀를 볼 때면 항상 내 마음이 어느 정도 들뜨기 때문에 그냥 머물면서 그녀의 의자 뒤에 가서 섰어. 그리고 얼마쯤 지나서야 나는 그녀가 전보다 덜 솔직하고 조금은 난처해하면서 나와 얘끼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 그런 태도가 눈에 띌 정도였지.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마음이 상해 집으로 가려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냥 있었어. 왜냐하면 그녀를 기꺼이 납득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설마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데다, 그녀로부터 호의에 찬 말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됐건, 그사이 손님들이 꽉 들어차는게 아니겠어. 프란츠 1세가 대관식을 할 때 입었던 옷으로 온통 차려입은 F 남작, 관직은 없지만 귀족 작위를 고려해 여기서는 ‘폰’을 붙여 부르는 궁중 고문관 R와 귀가 먼 그의 부인 등등. 옛 프랑켄식 복장의 해진 곳을 새로운 유행의 천으로 기워 입은, 보잘것없는 차림의 J도 빼놓을 수 없겠지. 이런 치들이 무더기로 오는 거야. 나는 내가 아는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가 그날따라 말을 아주 아끼지.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오직 B 양에게만 주의를 기울였어. 나는 홀 한쪽 끝에 있는 여자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이나, 이것이 남자들에게도 이어진 것 그리고 S 부인이 백작과 얘기하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어. (이 모든 사실을 나중에 B 양이 내게 말해주었지.) 마침내 백작이 내게 다가와서는 창가로 끌고 갔어. 그는 이렇게 얘기했지. “우리 모임의 이상한 관계를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자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군. 나는 결코······.” 나는 이야기를 가로막았어. “백작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진작 그 점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생각과 행동이 달랐던 점을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까부터 물러나려 했는데, 못된 악마에게 붙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 웃는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어. 백작은 나의 두 손을 잡았는데, 여기엔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감정이 실려 있었어. 나는 이 고상한 모임에서 슬쩍 빠져나와, 이륜마차를 타고 M 방향으로 달렸어. 거기 언덕 위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호메로스를 펼치고, 율리시스가 훌륭한 돼지치기들에게 대접받는 멋진 구절을 읽었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
그날 저녁 나는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하려고 음식점으로 갔는데, 아직 손님이 몇 명 있더군. 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느라 식탁보를 뒤집어 놓고 있었어. 이때 아델린이라고 하는 정직한 친구가 들어와 모자를 내려놓더니, 나를 쳐다보며 다가와서 나지막이 묻는 거야. “불쾌한 일을 당했다면서?” “내가?” 난 이렇게 되물었어. “백작이 너를 모임에서 내쫓았다면서.” ”그런 모임은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신선한 바깥바람을 쐬니 좋기만 하던데.” ”네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다행이군. 하지만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건, 그 소문이 벌써 자자하다는 거야.” 그제야 나는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어. 내 머릿속에선, 식사를 하러 와서 나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이런 생각이 나를 분통 터지게 만들었어.
게다가 오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고, 나를 시기하는 작자들이 쾌재를 부르며 “머리 좀 좋다고 뽐내면서 모든 상황을 무시해도 좋다고 믿는 오만불손한 자들이 어떤 꼴이 되는지 좀 보라지”라고 말하는 것이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을 듣게 될 테니, 이럴 땐 가슴을 칼로 찌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법이지. 주위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을 알아서 하면 된다지만, 무뢰한들이 누군가의 약점을 붙잡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당사자로서 참을 수 있는지 보고 싶어. 이들의 수다가 근거 없는 것이라면, 아 그때는 우리가 그 수다를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지.
7월 29일
아니야, 됐어! 모든 것이 잘됐어! 내가 그녀의 남편이었다면! 오, 나를 창조하신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내게 이 축복을 허락하셨다면, 내 모든 삶 자체가 평생 이어지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눈물 흘리는 것과, 나의 헛된 소망을 용서하십시오! 그녀가 내 아내였다면! 내가 만약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피조물을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빌헬름, 알베르트가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안을 때면 내 온몸에 전율이 일어.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빌헬름? 그녀는 알베르트보다 나와 함꼐하는 게 더 행복했을 거야! 아, 그는 마음의 모든 소망을 충족시켜 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감수성이 약간 부족하지. 이 부족함은 ─ 네 마음대로 해석해 ─ 똑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뛰지 않는 그런 감정이야. 어떤 책을 읽다가 내 마음과 로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런 대목에서 말이야. 제3자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강렬해지는 수많은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지. 사랑하는 빌헬름! 그가 로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만한 사랑이면 어떤 보상을 못 받겠어!
어떤 참을 수 없는 인간이 내가 편지 쓰는 걸 방해했어. 내 눈물이 말라 버렸지. 정신도 산만해졌어. 잘 있어, 사랑하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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